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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여행지를 찾다가 문득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보고 싶었던 섬 중 몇 곳이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여행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에 법으로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빙하소멸: 수천 년 쌓인 얼음이 수십 년 만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페루 안데스 산맥 해발 5,000m에는 파스토루리 빙하가 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스키 대회가 열렸던 곳인데, 지금은 면적이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빙하 호수가 생겨나 점점 커지고 있죠.
안데스는 전 세계 열대 빙하의 3분의 2가 몰려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열대 빙하란, 적도 인근 고산지대에 형성된 빙하를 말합니다. 태양 복사 에너지가 강한 지역에 있지만 고도 덕분에 간신히 얼어 있는 상태라, 기온이 조금만 오르면 극지방 빙하보다 훨씬 빠르게 녹습니다.
문제는 이 빙하가 단순한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대 잉카 문명부터 오늘날까지 수백만 명이 이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식수와 농업 용수로 써왔습니다. 아마존 같은 거대한 우림도 안데스의 물 덕분에 유지됩니다.
빙하가 사라지면 또 다른 위협이 생깁니다. 바로 알루비온(Aluvión)입니다. 알루비온이란 빙하 붕괴나 산사태로 물과 흙, 바위가 뒤섞여 계곡을 따라 쓸려 내려오는 토석류를 말합니다. 1941년 와라스에서 20km 떨어진 빙하 호수가 범람하면서 알루비온이 발생했고, 도시 북부 대부분이 파괴되며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났지만 이건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최근에도 같은 지역에서 다시 알루비온이 발생해 2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습니다. 시작점은 산꼭대기의 작은 빙하 호수였습니다.
페루의 2023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약 9,400만 이산화탄소 환산톤입니다. 반면 한국은 6억 2,400만 톤으로 페루의 약 6.6배에 달합니다(출처: UNFCCC 유엔기후변화협약). 배출량은 훨씬 적은데 피해는 훨씬 크다는 이 불균형이, 기후소송이라는 흐름을 만든 핵심 배경입니다.
- 전 세계 열대 빙하의 3분의 2가 페루 안데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 열대 빙하는 극지방 빙하보다 기온 상승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 빙하 소멸로 생겨난 빙하 호수는 알루비온(토석류)의 직접적 원인이 됩니다
- 페루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한국의 15% 수준에 불과하지만 피해는 훨씬 큽니다
기후정의: 억울한 피해에 법으로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행 정보를 찾다가 기후소송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좀 막연하다 싶었습니다. 기후 변화와 특정 기업의 배출량 사이의 인과 관계를 어떻게 법정에서 입증한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울 루시아노 리우야라는 페루 농부가 실제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와라스에 사는 농부이자 산악 가이드인 사울은 독일의 대형 에너지 기업 RW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RWE는 석탄과 가스 등 화석 연료 발전으로 2017년 한 해에만 약 1억 6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 기업으로, 한 연구에서 1750년부터 201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의 약 0.47%를 책임지는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사울은 이 0.47%에 주목해, 팔카코차 호수 범람 방지 비용의 0.47%인 약 200만 원을 RWE가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5년 1심에서 기각됐지만 사울은 포기하지 않았고, 독일 함 고등법원은 2017년 항소심에서 "대형 온실가스 배출 기업은 기후 변화로 인한 손해에 원칙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며 사상 최초로 기후소송의 증거 조사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지 10년 만인 2025년 5월, 함 고등법원은 최종적으로 개별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기업의 기후 책임 원칙 자체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이후 기후 소송의 중요한 선례로 남았습니다.
바누아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바누아투는 호주 동쪽 2,000km에 위치한 태평양 섬나라인데, 최근 30년 동안 주변 해수면이 15cm 상승했고 이번 세기 안에 50cm 이상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됩니다(출처: IPCC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남태평양대학교 바누아투 로스쿨 학생 27명은 2019년 이 문제를 국제법으로 다뤄야 한다고 결론 내렸고, 그 움직임이 유엔총회 안건으로 이어졌습니다. 202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ICJ) 판사 15명은 만장일치로 "기후협약 불이행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역사적인 권고적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말이 있죠. "공동체는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말. 그런데 저는 이 기후 문제 앞에서 그 말이 정말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온실가스를 거의 내뿜지도 않은 나라의 국민들이 삶의 터전을 통째로 잃고 있는 현실이, 그 '공동 책임'이라는 말 뒤에 가려지는 것 같아서요.

헌법불합치: 한국에서도 기후는 이제 기본권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도 기후 피해를 직접 겪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뉴스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몇 년 전 여름, 도심 한복판에서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차들이 잠기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봤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매해 여름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죠. 농부 황성열 씨의 경우는 더 가혹합니다. 2024년 늦더위와 병충해로 수확량이 35%나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청소년들과 농부들이 법 앞에 섰습니다. 2020년 청소년 19명을 시작으로 4년 동안 총 네 건의 헌법 소원이 제기됐습니다. 핵심 쟁점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이 2050년 탄소 중립을 목표로 내세우면서도 2031년부터 2049년 사이의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경로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2024년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해당 법 조항이 국민의 환경권을 침해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지만 즉시 폐기 시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어 일정 기한 내에 국회가 법을 개정하도록 명령하는 결정 방식입니다. 헌재는 2026년 2월까지 2031년 이후 구체적인 감축 목표를 법에 반영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국가의 기후 대응을 헌법의 문제로 판단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한국 헌재의 이 결정은 일본 청년들이 나고야 지방법원에 제기한 기후 소송에도 영향을 줬고, 두 나라 기후 활동가들이 서로의 전략을 공유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한국의 2030년 감축 목표 자체가 목표 시점이 다가올수록 감축 폭이 급격히 커지는 구조여서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또 순 배출량 기준, 즉 숲과 녹지가 흡수한 탄소를 빼고 계산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도 남아 있습니다. 일부 재판관들은 이 감축 설정 방식 자체가 기본권 침해라는 소수 의견을 냈지만 다수 의견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기후소송이 실제로 효과가 있나요? 다 기각되지 않나요?
A. 개별 청구가 기각된 사례도 있지만, 중요한 건 판결 자체보다 법원이 세운 원칙입니다. 독일 함 고등법원은 기업의 기후 책임 원칙을 인정했고, 한국 헌재는 국가의 기후 대응 의무를 헌법 차원에서 확인했습니다. 이 원칙들이 이후 소송의 논거로 쌓이는 구조입니다.
Q. 열대 빙하가 사라지면 실제로 어떤 피해가 생기나요?
A. 식수와 농업 용수 고갈 문제가 가장 직접적입니다. 여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생기는 빙하 호수가 알루비온(토석류)의 원인이 됩니다. 알루비온은 물·흙·바위가 뒤섞여 계곡을 쓸어내리는 재난으로, 1941년 페루 와라스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사례가 있고 최근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Q. 한국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실제로 달라지는 게 있나요?
A. 2026년 2월까지 국회가 2031년 이후의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법에 반영해야 합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해당 조항은 효력을 잃습니다. 수치 몇 퍼센트의 변화보다, 기후 대응이 정부의 선택이 아닌 국민의 권리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는 점이 더 큰 의미입니다.
Q. 바누아투 같은 나라는 왜 직접 배출국을 상대로 소송을 못 하나요?
A. 현재 국제법에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직접 기후 피해 배상을 청구하는 통로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2024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적 의견이 이 통로를 열어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권고적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이후 국내외 소송에서 유력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Q. 우리나라 미세먼지처럼 다른 나라에서 넘어오는 피해도 소송으로 다툴 수 있나요?
A. 현재로서는 국가 간 월경성 대기오염 피해를 국제소송으로 다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ICJ의 기후 관련 권고적 의견이 누적될수록 "오염을 유발한 국가가 피해국에 책임을 진다"는 법리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방향 자체는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결론
여행지를 찾다가 기후소송을 알게 됐다고 하면 좀 뜬금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오히려 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후 위기는 환경 전문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여행을 가려고 검색창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일상과 이미 맞닿아 있습니다.
페루의 농부 사울이 10년 동안 법정을 오간 것도, 바누아투의 로스쿨 학생들이 ICJ 문을 두드린 것도, 한국의 중학생 제하가 헌법 소원에 이름을 올린 것도 결국 같은 질문입니다. "이 피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지 않습니까?" 결과가 늘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 질문이 쌓이면서 법원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UNFCCC나 IPCC의 최신 보고서를 한번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수치들이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그 구체성이 오히려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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