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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식빵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곰팡이란 음식을 망치고 벽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체르노빌 원자로 내부에서 발견된 검은 곰팡이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방사선을 피하기는커녕 스스로 빨아들여 성장 에너지로 쓰는 곰팡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방사성 굴성 — 죽음의 땅에서 발견된 기이한 생존 전략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제4호기 원자로가 폭발했습니다. 인구 5만의 계획도시 프리피야트는 하루아침에 봉쇄됐고, 방사능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서유럽 전역까지 퍼졌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수천 명 이상이 암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 그대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입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97년, 미생물학자 넬리지다 노바 박사는 방호복을 걸치고 제4호기 원자로 내부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터무니없이 무모한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원전 주변 흙을 조사하던 중 곰팡이 균사체가 방사선 방향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균사체란 곰팡이의 몸을 구성하는 실 모양의 세포 집합체로, 식물로 치면 뿌리와 줄기에 해당합니다. 이 균사체가 빛이 아닌 방사선을 향해 자란다는 건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원자로 벽면과 파이프, 전선까지 새까만 곰팡이가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이 현상에 방사성 굴성(Radiotropism)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방사성 굴성이란 생물체가 방사선 자극에 반응해 그 방향으로 성장하는 성질로, 식물이 햇빛을 향해 자라는 광굴성(Phototropism)과 같은 원리입니다. 체르노빌 일대에서 이런 특성을 가진 곰팡이가 무려 36종이나 확인됐다는 사실은 제가 처음 접했을 때 진짜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곰팡이들은 어떻게 방사선 속에서 살아남는 걸까요? 핵심은 멜라닌(Melanin)입니다. 멜라닌이란 사람의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을 결정하는 색소로, 자외선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피부에 멜라닌이 많을수록 햇빛에 강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체르노빌 검은 곰팡이의 세포벽에는 이 멜라닌이 아주 꽉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유독 새까만 색을 띠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거죠.
멜라닌의 방어 방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패와는 다릅니다. 날아오는 방사선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그물망 구조 속으로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리는 방식입니다. 그 뒤 에너지를 밖으로 못 빠져나가게 가두고, 방사선이 세포 안에 만들어낸 독성 물질까지 중화시킵니다. 이중 방어 시스템인 셈입니다.
- 방사성 굴성(Radiotropism): 방사선 방향으로 균사체가 자라는 성질
- 멜라닌의 이중 방어: 방사선 에너지 흡수 + 독성 물질 중화
- 체르노빌에서 발견된 방사선 선호 곰팡이 36종 확인
- 균사체가 방사선을 향해 뻗어 나가는 광경이 최초 발견의 계기
방사선 합성 — 곰팡이가 바꿀 수 있는 것들
어렸을 적 집 창문에 결로가 생길 때마다 거기서 까맣거나 푸른 곰팡이가 조금씩 피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그게 그냥 더럽고 해로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곰팡이는 죽은 유기물을 분해해서 자연 순환을 돕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제 편견이 꽤 일방적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2007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출처: Albert Einstein College of Medicine)의 핵과학자 예카테리나 다초바 박사는 체르노빌 곰팡이가 방사선 환경에서 성장 속도가 10% 더 빨라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박사는 이 과정을 방사선 합성(Radiosynthesis)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방사선 합성이란 식물이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듯, 곰팡이가 방사선 에너지를 대사 활동에 직접 활용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만 과학계에서는 아직 이를 완전히 증명된 사실보다는 유력한 가설로 보고 있습니다. 멜라닌이 방사선을 성장 에너지로 전환하는 정확한 분자 메커니즘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고, 체르노빌의 모든 검은 곰팡이가 동일하게 방사선을 향해 자라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발견에 가장 열광한 곳은 NASA였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에게 외계인보다 더 무서운 건 우주 방사선입니다. 태양풍이나 초신성 폭발로 날아오는 고에너지 입자는 무거운 납조차 뚫고 들어와 DNA를 손상시킵니다. NASA는 2018년 체르노빌 원자로에서 채취한 검은 곰팡이를 국제 우주 정거장(ISS)으로 쏘아 올렸습니다(출처: NASA). 결과는 예상을 넘어섰습니다. 이 곰팡이는 우주 방사선 환경에서 지구 대비 1.21배 더 빠르게 성장했고, 스스로 형성한 얇은 막이 방사선 차폐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화성에 기지를 짓겠다는 계획에서 방사선 차폐를 위해 납이나 두꺼운 금속판을 우주선에 실어 보내는 건 비용 면에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게가 늘수록 발사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NASA 연구진은 균사체 건축이라는 개념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균사체 건축이란 곰팡이 균사체를 배양해 건축 자재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씨앗처럼 가볍게 가져간 뒤 현지에서 배양해 집과 가구를 만드는 아이디어입니다. 벽에 손상이 생기면 스스로 재생하는 자가 복구 기능까지 갖출 수 있다는 점도 가능성 중 하나로 보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리면 이 연구가 단순한 과학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방사능 오염 지역의 오염 물질을 곰팡이가 스펀지처럼 흡수해 격리하는 바이오 정화 방식,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정상 세포를 보호하는 멜라닌 기반 보호제, 납 없이 벽에 칠하기만 해도 방사선을 차단하는 코팅 소재. 어쩌면 우리 바다와 우리 국토를 지킬 현실적인 방법이 이 검은 곰팡이에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저만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체르노빌 검은 곰팡이는 사람에게 해롭지 않나요?
A. 이 곰팡이들 중 일부는 크립토코쿠스처럼 면역이 약한 사람에게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방사선 환경에서의 유용성과 인체 안전성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현재 연구는 곰팡이 자체보다 멜라닌 성분을 추출·정제해 활용하는 방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Q. 방사선 합성은 광합성과 같은 원리인가요?
A.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과정은 다릅니다. 광합성은 엽록소가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고, 방사선 합성은 멜라닌이 방사선 에너지를 대사 활동에 쓴다고 추정되는 과정입니다. 다만 정확한 분자 메커니즘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아 현재는 유력한 가설 단계로 봐야 합니다.
Q. 멜라닌이 방사선을 막는다면 피부가 어두운 사람이 방사선에도 더 강한가요?
A. 피부 멜라닌은 자외선 차단에는 효과적이지만, 엑스선이나 감마선 같은 고에너지 방사선까지 막아주는 수준은 아닙니다. 체르노빌 곰팡이의 멜라닌은 세포벽 전체에 고농도로 존재하며, 방사선 흡수와 독성 중화라는 특수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피부 멜라닌과는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Q. 이 곰팡이를 이용한 방사능 정화는 실제로 쓰이고 있나요?
A. 현재는 실험실과 소규모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곰팡이가 방사성 오염 물질을 흡수하는 원리 자체는 확인됐지만, 실제 오염 지역에 대규모로 적용하려면 배양 방식, 수거 및 처리, 이차 오염 방지 등 풀어야 할 기술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결론
귤 한 상자를 다 먹어갈 무렵 바닥에 눌린 귤 몇 개에 초록빛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는 걸 보며 가루가 흩날릴까 봐 손끝으로 조심히 집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불쾌함을 생각하면, 같은 곰팡이가 우주 기지의 벽을 만들고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는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생태계 안에서 분해자 역할을 묵묵히 해온 곰팡이가 사실 그 어떤 생물보다 극한 환경에 잘 적응해 왔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됐습니다. 방사성 굴성과 방사선 합성, 그리고 멜라닌의 이중 방어 구조는 우리가 볼품없다고 여긴 것들 안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체르노빌이라는 인류 최악의 재앙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열 단서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돕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방사성 굴성, 균사체 건축 같은 키워드로 더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