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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롤라 베어 (기후변화, 잡종 교배, 북극 생태계)

발그레돌 2026. 8. 1. 18:24

목차


    여름 저녁, 친구 손에 이끌려 동네 뒷산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이 산에도 곰이나 호랑이가 살았겠구나.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죠. 북극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쪽은 동물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조합이 새로운 종으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회색곰과 북극곰 사이에서 태어난 그롤라 베어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북극곰과 회색곰]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교배, 그롤라 베어의 등장

    2006년, 캐나다 북부 색스 하버에서 사냥꾼 짐 마텔이 이상한 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털은 북극곰처럼 희었는데, 얼굴 구조는 영락없이 회색곰이었습니다. 짧은 주둥이, 솟은 어깨, 굽은 등. 캐나다에서는 원주민 동행 하의 북극곰 사냥은 합법이지만 회색곰 사냥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당국은 DNA 분석을 의뢰했고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수컷 회색곰과 암컷 북극곰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이른바 '그롤라 베어(Grolar Bear)'였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솔직히 공상과학 영화 설정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야생에서 서로 다른 종이 교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워낙 드문 일이라서요. 그런데 이건 단 한 번의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2010년에 또 다른 그롤라 베어가 발견됐고,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만 무려 여섯 마리의 잡종 곰이 확인됐습니다. 2014년에는 야생동물 탐험가들이 알래스카에서 직접 사진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진화 생물학자 배스 샤피로 교수는 그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극곰의 머리를 가졌지만 회색곰의 몸을 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지목한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반대로 광산과 도로 개발로 내려갈 곳이 없어진 회색곰은 따뜻해진 북극해 방향으로 올라오면서 두 종이 마주치는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는 것입니다. 알래스카 북부 이누이트 족이 고래를 해체하고 남긴 뼈 더미에 예전에는 북극곰만 나타났는데, 요즘은 회색곰이 자주 목격된다는 현지 보고도 있습니다. 몬태나 대학의 크리스 셔비 교수는 이 고래 사체 더미가 두 종의 만남의 장소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물학적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잡 가임성(hybrid fertility)입니다. 여기서 교잡 가임성이란,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 실제로 후손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노새는 말(염색체 64개)과 당나귀(염색체 62개) 사이에서 태어나 염색체가 63개가 되고, 상동 염색체의 쌍이 맞지 않아 감수분열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번식이 불가능하죠. 그런데 그롤라 베어는 다릅니다. 회색곰과 북극곰은 약 15만 년 전에 분기됐고, 염색체 수가 둘 다 74개로 동일합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도 74개 염색체를 보유하며, 성공적인 번식이 가능합니다.

    • 그롤라 베어의 첫 야생 발견: 2006년, 캐나다 색스 하버 (DNA 분석으로 확인)
    • 2012~2014년 사이에만 여섯 마리 추가 발견
    • 회색곰·북극곰 모두 염색체 74개 → 잡종도 번식 가능
    • 원인: 북극 빙하 감소 + 서식지 개발로 두 종의 서식 범위가 겹침

    밴더빌트 대학의 생물학자 라리사 박사는 2021년, 그롤라 베어가 머지않아 북극곰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 근거는 식성입니다. 회색곰은 연어, 사슴, 곤충, 식물 뿌리, 음식물 쓰레기까지 먹는 전형적인 잡식성 동물이고, 그롤라 베어도 두개골 형태가 유사해 비슷한 식성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다표범과 물범 사냥에만 특화된 북극곰보다 빙하가 녹아가는 환경에서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건 아직 전망이지 확정이 아닙니다. 그롤라 베어의 행동 양식이 실제로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출처: Nature).

    요약: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겹치기 시작한 회색곰과 북극곰이 야생에서 교배해 그롤라 베어를 낳았고, 두 종의 염색체 수가 같아 번식도 가능하다.

     

     

    북극 생태계의 또 다른 교잡종, 나루가의 등장

    그롤라 베어만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바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매드 피터 박사는 이누이트 사냥꾼의 창고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고래 두개골을 발견했습니다. 벨루가처럼 짧은 이빨이 여러 개 있으면서도, 일각고래처럼 앞으로 뒤틀리며 뻗어 나온 이빨 구조를 가지고 있었죠. 30년이 지나 정밀 DNA 분석을 한 결과, 그의 추측은 맞았습니다. 일각고래(Narwhal)와 벨루가(Beluga) 사이에서 태어난 교잡종, 나루가(Narwga)였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나루가의 식성 분석이었습니다. 코펜하겐 대학교 글로브 연구소의 엘린 로렌젠 박사는 나루가의 이빨에서 추출한 탄소 동위원소를 분석했는데, 나루가의 주 먹이가 해저에 사는 조개 같은 무척추동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고기를 사냥하는 벨루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던 거죠. 잡종이 단순히 부모 종을 반반 섞은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존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건 정말 예상 밖의 발견이었습니다.

    2018년에는 그린란드 해양 포유류 연구단체가 실제로 어린 수컷 일각고래가 벨루가 무리에 섞여 함께 수영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관찰은 나루가의 존재가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현장 증거로 평가됩니다. 현재까지 약 20마리의 나루가가 보고된 상태입니다(출처: Science).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잡종의 등장을 놓고 "새로운 종이 탄생했다, 신기하다"는 반응도 있고, 반대로 "자연이 스스로 적응하는 거니 괜찮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시각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롤라 베어와 나루가는 진화의 자연스러운 산물이긴 하지만, 이 교잡이 일어난 배경 자체가 인간이 파괴한 서식지와 급격한 기후 변화입니다. 동물들이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딪히게 된 상황에서 나온 결과라는 거죠. 적응이 시작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진화 생물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전자 유입(gene flow)'이라고 부릅니다. 유전자 유입이란, 서로 다른 개체군 사이에서 유전자가 이동·교환되는 과정을 말하는데, 환경이 급격히 바뀔 때 이 현상이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현생 인류의 DNA에는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습니다. 수십만 년 전 비슷하지만 다른 인류 선조들 사이에서 교잡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우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잡종이란 낯선 괴물이 아니라, 진화 그 자체의 한 형태입니다.

    요약: 북극해의 빙하 감소로 일각고래와 벨루가의 서식지도 겹치기 시작했고, 그 교잡 결과인 나루가는 부모 종과 전혀 다른 생존 전략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 그롤라 베어는 실제로 번식이 가능한가요?

    A. 네, 가능합니다. 노새처럼 번식이 불가능한 잡종도 있지만, 그롤라 베어는 회색곰과 북극곰의 염색체 수가 둘 다 74개로 동일하기 때문에 잡종도 정상적인 감수분열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2세대 잡종 곰이 야생에서 발견된 사례도 있습니다.

     

    Q. 그롤라 베어가 북극곰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까요?

    A. 대체 가능성을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이건 아직 전망 수준입니다. 그롤라 베어가 잡식성이라 변화하는 북극 환경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실제 행동 양식과 생존율 데이터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결론을 내리기엔 이른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나루가는 어떻게 발견됐나요?

    A. 1990년대에 매드 피터 박사가 이누이트 사냥꾼의 창고에서 이상한 두개골을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30년 뒤 정밀 DNA 분석을 통해 일각고래와 벨루가의 교잡종임이 확인됐고, 2018년에는 그린란드 해양 포유류 연구단체가 일각고래가 벨루가 무리에 섞여 지내는 장면을 직접 포착하며 야생에서의 교배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됐습니다.

     

    Q. 기후변화 말고 다른 원인도 있나요?

    A.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와 함께 숲의 난개발도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로 회색곰의 기존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북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겹쳤다는 설명입니다. 기후변화 단독이 아니라 인간의 토지 이용 방식 전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결론

    산을 걷다가 옛날에는 이 자리에 곰이 살았겠다 싶었던 그 순간, 저는 사라진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북극에서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종들이 만나고, 없었어야 할 것들이 생겨나고 있죠. 그롤라 베어와 나루가의 탄생은 분명 진화라는 틀 안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들을 괴물 취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 교잡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는지를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들이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책임을 면제해주진 않으니까요. 적응할 시간조차 없이 환경이 바뀐다면, 그 다음은 어떤 종도 버티기 어렵습니다. 북극 생태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기후 변화가 단순히 기온 문제가 아니라 종의 구성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시각으로 한 번 더 들여다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Y7J1jA_diE